
연세대학교 커뮤니케이션 대학원에서 마련된 하이너 괴벨스의 특강 “부재의 미학”을 들었다. 음악과 연극, 멀티미디어, 퍼포먼스를 넘나드는 예술가 하이너 괴벨스를 직접 볼 수 있었던 것은 특별한 경험이었다. 그는 자신의 작업에 대해 여러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그중 나는 오케스트라 작품 〈A House of Call〉이 가진 예술적 변혁에 특히 주목하게 되었다.
예술적 변혁은 대개 '무엇(what)'을 다루는가보다는, 무엇을 '어떻게(how)' 다루는가에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어떻게'는, 그 작품이 취하는 형식에서 감지된다. 〈A House of Call〉은 "전세계에서 수집한 소리와 목소리들의 녹음을 통합한 작품"이다. 괴벨스는 다양한 이들의 목소리뿐 아니라 1910년대에 수집된 왁스 실린더 녹음, 전쟁 포로들의 거친 목소리, 건설 현장의 ‘소음’을 가져왔다. 그는 앨범 설명문에서 녹음들이 모두 “자신에게 감동을 준 것”들이라고 설명했다. 작품에서는 이러한 ‘소음’을 들려주는 스피커와 무대 위 오케스트라가 함께 대화한다. 이런 시도는 음악에서 '음'이라는 개념에 대한 근본적 질문으로 생각된다.
서구 음악의 전통적 '음' 개념은 배음 현상에 기반한다. 레너드 번스타인이 강의록 『대답없는 질문』에서 주장했듯이, 서구 조성음악은 정수배로 나타나는 배음 간의 규칙적 관계를 따라 발전해온 것으로 보인다. 그는 배음이 음악에서 “실체적 보편자”라고도 표현한다. 악기의 배음 구조에 대해 연구했던 과학자 헬름홀츠 역시 배음을 갖는 음이 그렇지 않은 소리와 달리 ‘음악적’이라 주장했다. 이에 따르면 정수배의 규칙적인 관계가 소리의 음악성에 결정적 역할을 해온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괴벨스는 무대에서 ‘음’이 아닌 ‘소음’을 재생하고, 오케스트라 악기들이 연주하는 ‘음’이 그와 대화하도록 설정했다. 배음 규칙을 지닌 악기의 ‘음’과 그렇지 않은 ‘소음’을 함께 활용한다. 이러한 형식을 경험하면서 나는 왜인지 그 작품을 구성하는 중심의 힘이 느슨하다는 것을 감각한다. 귀를 감싸는 음과 소음의 다양한 텍스처를 대상으로 지속적인 재초점화를 경험한다. 가끔은 목소리나 특정 악기에 집중하면서도 또 다시 새로운 모습으로 변화하여 등장하는 선율, 텍스처에 끊임없이 초점을 옮겨간다.
이때 무대에서 지휘자를 중앙이 아닌 측면에 배치했다는 점을 중요하게 언급할 필요가 있다. 그는 ‘관객이 공격받지 않기를 원했다’, ‘관객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발견할 자유를 주고 싶었다’며 지휘자를 옮겨둔 이유를 설명했다. 이 결정은 오케스트라의 권위적 구조를 부정하는 것이면서 관객의 자유를 위한 일이었다. 또한 지휘자가 비켜난 무대는 관객이 경험하는 소리의 지속적인 재초점화를 시각적으로도 드러내는 기반이 된다.
이 작업은 특정한 의도 없이 '모든 사람'들의 '다른 것'에 반응하고 이를 병치하는 방식이다. 작업 방식에 대한 앨범 설명문에서 "모든 사람이 다른 것을 가져옵니다. 다른 접근법, 다른 연주 방식과 음악을 상상하는 방식을 말입니다."라고 말했듯이, 다양한 반응들을 나열하는 것이다. 'A는 B다’가 아니라, 'A 그리고 B 그리고 C …' 이렇게 서술하는 것이다. 괴벨스는 정의하고 규정하는 대신, 나열하고 병치시켰다.
그런데, 지휘자를 없앨 수는 없었던 것일까? 이 질문은 모든 전체 속의 중심에 대한 질문이다. 관객에게 자유를 주기 위한 방법으로 지휘자를 없앨 수도 있지 않나. 중심으로서 지휘자의 존재는 작품을 구성하기 위한 필수 조건이었던걸까?
이 결정을 20세기에 나타난 음렬주의 음악과 그 한계와 연결지어 생각해볼 수 있을 것 같다. 아놀드 쇤베르크가 개발한 12음 기법은 중심음의 형성을 회피하고 모든 음을 동등하게 다루려는 혁명적 시도였다. 전통적인 조성음악에서 으뜸음이 갖는 위계적 지배력을 해체하고, 12개의 반음계를 모두 평등하게 사용함으로써 음고의 민주주의를 실현하려 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실험은 역설적 결과를 낳았다. 음렬이라는 새로운 구조적 원리가 또 다른 중심으로 작용하게 되었고, 어떤 경우엔 작곡가의 의도와 체계에 오히려 더욱 강력한 통제력을 발휘하게 되었다. 모든 음을 평등하게 다루려던 시도가 결국 더욱 엄격한 규칙과 체계를 만들어낸 것이다. 이런 음악을 들어보면 개인적으로, 비인간적이라는 감상을 느낀다. 실제로 음렬 음악은 많은 비판에 직면하여 사람들을 설득하지 못했다. 음렬의 경험은 예술 작품에서 중심을 완전히 제거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아닐까. 더 넓게는 20세기 사회주의 이념이 위계 없는 평등사회를 꿈꾸었지만 결국 새로운 형태의 권력 중심을 만들어낸 것과도 유사한 맥락으로 읽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앞서 언급한 배음 현상으로 돌아가보면, 그 구조에도 기음(Fundamental tone)이라는 중심이 있다. 인간의 귀는 기음을 인식한다. 우리가 ‘음’을 지각한다는 것은 곧 그 중심을 지각한다는 것이다.
괴벨스의 선택은 중심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그 위치를 이동시키고 권력을 분산시키는 것이었다. 지휘자는 여전히 존재하지만 무대의 중앙을 차지하지 않으며, '음'은 여전히 울려 퍼지지만 '소음'과 동등한 위치에서 대화한다. 이는 예술에서 전체성과 권위를 재정의하는 시도이자 권위적 구조를 전복하려는 성찰의 결과다.
〈A House of Call〉이 보여주는 예술적 변혁은 ‘부재’를 보존한다는 것, 곧 ‘의도를 가지지 않는다는 것’에서 출발한다. 이는 비폭력주의(비전체주의)로서의 개방성과 연결된다. 'A 그리고 B 그리고 C …’의 화법은 작품과 수용자 모두에게 자유를 준다. 단지 우리에게 음악이란 무엇인지, 예술이란 무엇인지, 소통이란 무엇인지를 질문한다. 예술적 변혁은 결국 우리가 세상을 ‘어떻게’ 인식하고 경험하는가와 연동한다. 괴벨스는 우리에게 완전함과 불완전함 사이에서, 중심과 주변 사이에서, 새로운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는 감각을 선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