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맨 인 블랙〉은 하룻밤 동안 프랑스의 어느 극장에서 중국의 작곡가 왕시린을 찍은 영화다. 왕시린은 중국 문화대혁명의 피해자다. 그는 작곡가로서 음악을 선전 도구로 이용하려는 중국 정부를 비판하며 이렇게 말했다. “정치만 있고 예술은 없다.” 결국 그는 시대에 공명하지 못하는 ‘반혁명분자’, ‘정치범’으로 낙인찍혔다. 낙인은 그에게서 떨어지지 않는 그림자가 되었다. 참혹한 고통이 따라왔다. 지금 그 고통을 떠올리면 울부짖게 된다. 감금과 고문, 폭력, 그리고 살해당하거나 자살한 동료들. 그림자는 왕시린을 집어삼켰다.
“난 음악으로 말해야지.” 그는 음악으로 그 고통을 말하려 했다. 자신이 목격한 중국 당국의 부조리를 음악으로 묘사하는 방법이었다. 악장 별로 ‘도살장’, ‘광인들의 노래’, ‘중국 군중의 행렬’이라 설명하는 교향곡 3번이 그 예다. 오케스트라에서 바이올린, 튜바 등의 악기가 각각 노래하고 있는 것이 곧 이러한 형상들임을 설명한다. 그는 영화 속에서 이러한 자신의 삶과 예술에 대해 직접 말한다. 그 배경에서는 왕시린의 음악이 함께 들려온다.
여기서 음악이 그의 말에 공명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말을 방해하는 방식으로 존재한다. 음악의 음량이 커지면서 왕시린의 발화가 음악에 가려진다. 말이 아예 들리지도 않는 지경이다. 자막을 통해서야 그의 말이 전달된다. 왜 음악은 왕시린의 말을 방해하는 걸까.
영화에서 비디제시스(non-diegetic) 음악은 대개 내화면과의 긴밀한 결속을 목표로 한다. 영화의 내러티브를 강화한다는 목적을 지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영화 음악은 영화 이미지를 부연하는 기표로 매끄럽게 전환된다. 어느 영화음악 앨범의 트랙 리스트를 살펴본다면, 아마도 각 트랙은 그것이 사용된 장면을 요약하는 단어, 혹은 그 장면의 주요 대사를 제목으로 하고 있을 것이다. 영화음악은 영화 텍스트를 자신의 제목으로 삼으면서까지 스스로 스크린에 결속되려는 존재인 것이다.
그런데 〈맨 인 블랙〉에서 왕시린의 음악은 영화와의 결속을 거부한다. 작곡가 왕시린의 말을 가로막으면서. 그리고, 음악의 배치가 왕시린의 말에 그다지 들어맞도록 되어있지도 않다. 그가 교향곡의 느린 악장을 이야기할 때 여전히 빠른 음악이 연주되고 있다. 이러한 음악의 태도는 왕시린의 말을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이 영화를 보기 전에 왕시린의 교향곡을 듣는다고 상상해보자. 우리는 ‘도살장’, ‘광인들의 노래’, ‘중국 군중의 행렬’을 떠올릴 수 있을까? 그것은 불가능하다. (가사가 있는 노래를 제외한) 음악은 그 자체로 형상을 표의할 수 없다. 사람이 음악을 듣고 어떤 형상을 떠올리는 것은 음악을 텍스트로 결속시켰던 경험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베토벤의 5번 교향곡. 제목없이 발표된 그 곡의 의미에 대한 질문에 베토벤은 답했다. “운명은 그렇게 우리에게 노크를 한다.” 이로써 5번 교향곡은 ‘운명’을 표시하는 음악적 기표가 됐다. 우리는 경험적으로 [솔-솔-솔-미b] 모티브를 ‘운명’의 부름으로 받아들이게 됐다.
왕시린의 교향곡은 그냥 … ‘음악’이다. 작곡가가 자신이 보고 겪은 고통에서 출발하여 그것을 묘사하려 했다는 음악인데, 그 자체로 고통을 담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영화에서 음악은 왕시린의 말을 가로막으면서, 자신이 어떤 형상을 표의하고 있는 것이 아닌 그냥 … ‘음악’이라고, 항의하는 것이다. 자신에게 그림자가 드리워지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다. 마치 “정치만 있고 예술은 없다”며 순수한 예술을 지키고자 했던 과거 왕시린처럼.
음악을 정치로부터 해방시키고 싶었던 작곡가 왕시린. 그가 자신의 음악에 그림자를 드리우려 한다. 그 그림자가 음악을 집어삼키게 한다. 과거 자신의 고통을 낳았던 ‘그림자 붙이기’를 자신의 작품을 향해, 반복한다. 어쩌면 왕시린은 온전하고 순수한 예술이란 불가능한 이상인 것이라 단념한 걸까. 자신이 그림자로 존재할 수밖에 없음을 받아들인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