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궤도에서: <베크마이스터 하모니즈>(벨라 타르, 2000)

February 2026

에스테르는 말한다. 우리가 걸작이라 믿어온 하모니는 "실제로 존재하는가". 그에 따르면 서구 음악의 역사는 완전히 "잘못된 기초" 위에 세워진 "명백한 기만"에 불과하다. 그는 "피타고라스와 아리스토텔레스가 살았던 시절"의 순수한 조율로 "돌아가야" 한다고 역설한다.

이 선언은 영화의 끝에서 뒤집힌다. "신의 음조"를 갈망하던 그는 다시 피아노를 "보통의 방식"으로 조율한다. 영화의 첫 장면에서 술 취한 군중이 거대한 행성의 궤도를 흉내내며 '돌아갔던' 것처럼, 에스테르는 자신이 부정하던 질서의 궤도 위로 다시 '돌아간다'.

오프닝 장면에서 야노스의 대사를 듣다보면 음향 공간이 영상과 비동기화되어있다는 감각이 전달된다. 그러면 음향의 존재론적 지위는 달라진다. 피사체의 동작에 동시적으로 진동하는 종속적 정보가 아니라 독자적인 물질이 된다. 이 지점에서 영화의 소리는 연출의 의지가 다분히 개입한 것으로 인식된다. 후반부 폭동 장면에서 이러한 형식이 더욱 분명히 드러난다. 시민들의 파괴 행위 속에서 인간의 목소리는 철저히 배제되어있으며, 오로지 폭력의 타격음만이 존재한다. 이는 광기가 그들 모두의 영혼을 집어삼켰음을 보여주는 것일까.

그러다 돌연 음악이 들려온다. 롱테이크 안에서 음악은 점진적인 유입 따위 없이 스위치를 켜듯이 시작되며, 시각적 전환(편집점)의 부재를 음향적 몽타주로 대체하는 듯하다. 특히 주목하게 되는 점은 나약한 노인의 모습이 화면에 잡히기 이전, 음악이 먼저 시작된다는 점이다. 일반적으로 영화음악이 영상이 만들어낸 정서적 기류에 반응하거나 뒤따르는 형식을 취한다면, 이 순간 음악은 어쩌면 이 영화에서 가장 핵심적인 시각적 정보보다 앞서 개입하며 그 시간을 먼저 진술한다. 벨라 타르가 음악을 도구가 아닌 배우와 같은 하나의 캐릭터로 다룬다는 점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비그 미하이의 음악은 네 개의 코드가 내내 반복되는 미니멀리즘 형식을 취하고 있는데, 서사를 전달하기보다 그저 시간의 무게를 견디는 카메라와 조응한다. 거대한 고래를 실어 나르는 트럭의 외양에서 칸칸이 구획된 평균율의 이미지를 연상한다. 그것은 피아노의 분할된 건반 이미지와도 겹쳐진다. 다만 반복되는 코드 위에서 불안정하게 떨리는 현악기의 소리는 질서 이면의 균열처럼 들리기도 한다.

에스테르가 피아노를 연주하는 모습은 영화에서 목격되지 않는다. 피아노 소리에 이끌려 들어간 그의 방에서 마주하게 되는 것은 비어 있는 피아노 의자와 소리를 송출하는 스피커다. 인간의 체계가 저지른 기만을 비판하는 지식인이 정작 인간의 테크놀로지에 누구보다 밀접하게 의존하고 있다.

그가 갈망한 "신의 음조" 역시 사실은 인간에 의해 계량된 또 다른 체계를 말하는 것에 불과하다. 순정률이라 불리우는 그것은 자연 배음과 완전히 동일한 특질을 지니는 것이 아니다. 태고의 피타고라스 음률 역시 인간이 자연 배음에 기반하여 수학적 비례로 음정을 분할하여 만들어낸 지적 체계에 불과하다. 인간의 기만을 부정하며 신의 질서를 좇아 도달하려 했던 순수라는 실체 자체가 허구였음을 확인하는 과정. 돌아가면 돌아갈수록 마주한 것은 또 다른 인간의 역사였을 것이다. 그는 그렇게 부서진 트럭과 남겨진 고래의 사체를 마주한다.